일단은 시간이 거의 없어졌다. 회사일은 내 업무이외에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서 시간을 쪼개서 이야기 하고, 술먹고, 어울리는 시간들을 만들어야 한다. 이로 인해서 내 블로그는 거의 주인이 찾아주지 않게 되었고, 살은 다시 찌게 되었다.
블로그는 짧지 않은 시간투자를 요구한다. 그에 반해서 트위터는 매우 짧은 시간안에 적지 않은 소식을 접할 수 있고, 나또한 글을 올릴 수 있다. 트위터의 특성상 긴 글을 올릴수도 없다. 이러한 특성은 트위터를 통해서 바쁘지만 짬짬히 서비스를 사용하게 하는 힘이 된다.
스마트폰의 보급과 단문을 이용한 트위터 서비스는 화장실에서조차 트위터를 사용하게끔 서비스 환경을 개선시켰다. 특히나 스마트폰의 성능이 향상되고,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웹서핑이 일정수준 않불편해지면서 PC앞에 앉게 되는 것은 회사에서 업무를 보거나, 집에서 특별한 일을 처리할 때 이외에는 앉지 않게 되었다.
PC는 분명히 옛날 지금과 같은 스마트폰의 개념으로 개인들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메인프레임의 시대에서 회사안에서 그것도 콘솔로, 천공카드를 통해서 컴퓨터에 접근했던 시절에는 PC는 그야말로 아주 경이로운 환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러한 PC에조차 가지 않고 바로 그자리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소비할 수 있게 해주는 모바일 환경의 시대이다.
나는 배 안에서 너무나 무료해서 요한나에게 말을 걸었다. 몇 가지 인도네시아 말과 조금 알고 있는 영어로 말이 안되면 글로 써서 몸짓 발짓 다해가며 얘기를 시작하였다. 요한나와 나에겐 기독교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말이 잘 통했다. 내가
알게 된 최초의 외국인인 요한나는 배안에서 나와 같이 찬송가를 불러 주었다. 요한나는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그렇게 해서 난 배 안의 끔찍한 상황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배에서 내려서 우리는 빨두아 뿔루까지 가기 위한 차를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차를 구할 수가 없어서 또 다시 2시간 정도를 낯선 곳에서 서성거렸다.
결국 그러다가 우리는 차를 구하지 못해 뽄띠아낙 근처의 교회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날 출발할 수 있었다. 나는 비행기, 기차, 배를
타고 지금은 버스를 타면서도 아직 봉사활동을 할 장소에 도착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그렇게 4시간 남짓 청룡열차와 같이 달리는 버스를 타고 우리는 뿔두아 뿔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빨두아 뿔루에서의 상황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나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곳 교회에서 일주일 정도를 생활하였다. 나 같은 경우는
여자라는 명분으로 목사님 사택의 남는 방에서 겨우 잘 수 있었고, 교수님과 남자들은 교회 시멘트 바닥에서
거적 같은 것을 깔고 자게 되었다. 우리는 도착한 다음날부터 활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우물을 만들거나 화장실을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너무나 의아해했다 아니 무슨 우물, 화장실 같은 것을 만들러
꼭 우리가 여기까지 와야 했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일까? 하지만 이것은 그 곳 상황을 모르는 가운데 했던 생각이었다. 인도네시아는 문화적으로 화장실과 우물이 없었다. 그래서 강가에서
목욕하고 설거지 하고 음식을 만들고 마실 물을 뜨고, 대소변을 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가축들도 그곳에서 대소변을 많이 보기 때문에 정말로 위생적이지 못했다.
그들은 더러운 물을 먹고 마시는 바람에 기형아 출산율도 많고, 피부병도 많고, 그 외의 여러 가지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 사정을 잘 아시는 인도네시아 목사님의 의견에 따라 우선은 시범적으로 빨두아 뿔루와 근접한 세 마을에 각각 화장실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사용하게
한 후 그것의 이점을 그들이 알고 그들 스스로 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에 화장실을 만들게 되었다.
그들은 문화적으로 화장실이라는 공간을 따로 만들지 않고 살아왔으며 화장실이 따로
있는 것이 위생적이어서 그들이 앓고 있는 질병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화장실 만들 자재를 살 돈이 없어서, 게을러서 화장실이나 우물을 따로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그들에게 경험을 통해서 그들 스스로 깨닫고 마을 공동으로 추후에라도 필요에 따라 만들 수 잇기를 기대하며 화장실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화장실을 만드는 것은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제일 힘들었던
일은 정화조와 비슷한 성격을 띤 구덩이를 가로, 세로 120cm정도로 3미터를 파 내려가야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이 사용한다고 가져온 연장은 곡괭이와 비슷한 도구와 커다란 끌 같은 것이 고작이었다. 우리는 당연히 삽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다시 한번 이들 문화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했다. 우리가 이 나라에서 삽이
없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몇 개 준비해 와도 좋을 것을 하고 말이다. 우리의 일은 모든 사람이 같이 일
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구덩이가 작기 때문에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며 들어가 흙을 파 내야 했다. 그나마 힘을 쓰는 것은 남자들이고, 우리 여자들은 파 올린 흙을
옆으로 치우는 일이 고작이었다. 흙을 곡괭이로 퍼내면서 발을 찟긴 아이도 있었고, 손에 물집은 기본이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남자들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일을 하다 보니 누구 한 두 사람은 일하고 옆에서는 할 일이
없어 앉아 있고 하는 식이 되풀이 되었다. 뭔가 프로그램을 더 준비했더라면 일하고 있지 않은 나머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었었을텐데 말이다. 그래도 세번째 마을에서는 근처에서 고운 모래를 얻을 수
있어서 강가에서 모래 퍼나르는 일을 여자들이 할 수 있었다. 온 몸에 모래를 묻히며 자루에 깨진 접시로
모래를 담으면서 뜨거운 태양아래 등이 흠뻑 젖도록 땅을 파내면서 우리 팀원들은 서로에 대해 더 끈끈한 팀웍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3개의 마을에 각각
화장실 만드는 일을 마친 후 더 깊은 오지로 출발하였다. 그곳은 빨두아 뿔루에서 4시간 정도를 버스로 더 들어가서 숲을 헤치고 30분 정도를 걸어
들어간 다음 다시 카누를 타고 강을 건너야 있는 쥬몽고라는 마을이었다. 우리가 이 마을에서 할 수 있었던
일들은 우리가 가져간 비타민과 피부약을 가지고 최소한의 의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우리 팀원 중에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은희와 내가 간호학과 학생이라는 명분으로 주최가 되어 의료봉사를 하게 되었다. 그곳은
인도네시아인인 요한나도 말이 잘 안 통하는 곳이라 요한나가 대충 통역을 해 주면 마인어과 학생인 명선이와 인도네시아에서 8년동안 살아온 희진이가 다시 요한나의 말을 우리에게 통역해주는 식으로 2중
통역을 해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양실조였다. 처방이라고
해봤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비타민 한달치 정도와 잘 먹고 잘 쉬라는 정도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잘 먹을 식량이 어디 있으며 잘 쉴 수나 있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우리의 의료봉사가
이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비타민은 만병통치약이 아닌데, 그것을 받아쥔 그들은 고마움을 감추지 못하고 연방 인사하며 우리 모두에게 악수를 권하고 돌아갔다.
우리가 쥬몽고에서 한 두번째 일은 이곳 어린이들에게 학용품을 나눠주는 일이었다. 준비해간 색연필과 볼펜, 크레파스,
가위, 자, 등을 우리의 초등학교 또래의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실 난 이렇게 그들에게 학용품을 나눠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되었다. 어차피 소모품인데 다 써버리면 없어질 것이 뻔하고 그러면 예전으로 다시 돌다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은 나뿐 아니라 다른 몇몇 팀원들도 공감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런 일로 고민하고 있었을 때 목사님이 말씀 하시길 이곳 사람들에게는 외국인이 자기 마을에서 며칠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많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으며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삶의 기쁨을 준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made in korea라고 써있는 학용품을 나눠주는 것이 우리나라를 알릴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공감은 됐지만 그래도 씁쓸했다.
내가 처음 봉사활동을 결심했을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해주겠다는 생각보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같이 공감해서 그들을 알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그들의 문화가 우리보다 뒤떨어졌으니 가서 이것 저것 가리켜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 봉사활동을 통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가 있었다. 그들의 문화가 저급하다는 것은 우리만의 기준을 가지고 편협한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인 것이었다. 결국 나 자신도 어느새 서구화된 시각으로 그들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이번 활동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 팀원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다음 봉사활동을 할 사람을 위해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선은 인도네시아
문화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가라는 것이다. 우리처럼 급하게 준비하다 보면 놓치기 쉬운 것들이 아주 많게
된다. 적어도 6개월 이상은 그 나라에 대해 공부하며 그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또, 우리처럼 갑작스럽게
봉사 활동할 장소나 프로그램이 바뀔 수 있다는 것에도 염두에 두어야겠다. 또한 그들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 나라에 대해 잘 아는 사람과 의논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우리의 경우 한국에서
그 곳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하고 인도네시아에 가서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곳
실정에 맞추어 준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또 한가지는 자신이 봉사활동에 대한 관점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라면
현지에서 힘든 상황에서 적응하기도 힘들고 현지인에게나 봉사활동을 하는 당사자에게나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이 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팀원들간의 단합을 중시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번 활동에서
가장 잘해낸 것이 있다면 이 팀웍이라 하겠다. 우리 팀의 경우 여자가 남자에 비해 많았고 남자들이 소수임에도
힘든 일은 거의 모두 남자들의 차지였다. 이러다 보면 불평도 있을만하고 짜증도 낼 만 한데 그들 모두가
별 다른 다툼 없이 잘 참아주고 서로를 생각해 주는 등 너무나 단합된 면을 많이 보여줘 서로서로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런 서로간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우리들이 인도네시아의 그 뜨겁고 숨막히는 열악한 환경에서 얼마나 견디어 냈을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취업을 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잡코리아에 이력서를 올리면 여기 저기서 적지 않은 면접제안을 받게 된다.
이번에도 잡코리아의 이력서를 조금 확인할게 있어서 공개로 해놓았다가 몇군데의 면접제안을 받고 그중 한군데를 갔었다.
회사는 분당에 있었고, 지하철역과 가까웠다. 뭐, 조금 멀지만 그래도 지하철로 이동 가능하기에 가보고, 면접을 보고.. 그만 덜컥 되버렸다. 좀 면접이 빨리 진행이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제 출근을 했는데, 바로 외부 프로젝트에 투입된다면서 현대모비스 연구소로 가게 되었다.
죽전쪽, 단국대학교 캠퍼스 뒤쪽에 위치하고 있는 연구소는 그야 말로 첩첩산중에 고립되어져 있었고, 자동차의 출입도 상당히 제안되어서 셔틀버스아니면 출퇴근이 힘들었다. 게다가 보안문제로 인터넷의 제약도 상당했다.
회사에서는 프로젝트를 위해서 미국 MS로 출장도 2개월간 가야 한다고 했다.
나름 일하는것도, 미국출장도 매력적이기는 한데.... 집에서 고생하게될 집사람과 아이들이 떠올랐다.
결국... 회사출근은 포기했다.
SI였기에 포기를 해도 아쉽지는 않았다. 그런 비슷한 일들은 얼마든지 골라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집과 멀리 떨어져서 다녀야 한다는것이 이제는 나이가 들다 보니 쉽지 않게 된 나를 발견하였다.
더불어서 그날 하루 대리였던 27살 친구가 삼성에서 SI일했던 경험담을 이야기 하는데... 듣으면서 드는 생각은.. 아직 젊고, 부양가족이 없기에 가능한 경험이다라는 것이다. 새벽4시까지의 무모한 회의, 주말없는 출근, 폭언 등등.. 돈때문에 어쩔수 없이 일해야 하는 SI업체들의 현실이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경력이든, 신입이든 개발자들이 매우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위에 27살 대리가 이미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박봉, 열악한 환경, 내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뒷치닥거리...